여름에 천연 냉장고 같이 시원한 곳에서 약간의 음주(?)도 즐길 수 있는 애주가들의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와인터널이다. 우리나라에는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예전에는 단선철도였으나 복선철도로 바뀌었거나 철도구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새로운 터널을 뚫어 필요가 없어진 터널들이 꽤 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런 이유들로 터널들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 터널들이 연중 일정기온이 유지된다는 장점을 활용해서 와인저장고 역할을 하게 되며 새롭게 부각된 곳들이 많다. 오늘은 이런 터널들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이 터널들은 대부분 터널 내 온도가 와인과 같은 주류의 저장온도(레드와인 13~18도, 화이트와인 8~12도)에 적합해서 각 지역에서는 지역특산물을 이용한 술을 만들고 그 술의 저장고 역할과 함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비단 온도 뿐만 아니라 어두운 곳 보관, 진동/소음 피하기, 습도 유지 등도 중요한데 터널들이 그에 부합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지는 못 하지만 즐기는 편이라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그 지역 전통주는 하나씩 사는 편이다. 그것도 무더운 여름에 여행하는 곳이 특히 와인터널이 있는 동네면 와인터널은 무조건 찾아가고 있다. 바깥 날씨가 35도가 넘는 폭염경보가 연일 계속되더라도 와인터널 안은 그 어떤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해서 아니 추워서 긴팔옷이나 얇은 담요라도 챙기는 것이 하나의 센스이다. 그럼 시원한 와인터널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
경북 청도 감와인터널
청도와인터널은 옛 경부선 폐철도 터널 자리에 감와인과 감식초 등을 저장한 저장고이자 지금은 훌륭한 관광지가 된 곳이다. 청도는 감, 특히 반시가 유명한 곳이고 전국에서도 감 생산량이 가장 많고 가로수마저도 감나무인 동네이다. 반시라 하면 대부분 반만 홍시인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반 반(盤), 감나무 시(枾)를 써서 쟁반처럼 납작한 감을 가리킨다. 그리고 와인에 떫은맛을 내는 탄닌이라는 성분이 감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와인을 만들기 적합했다고 한다. 청도감와인은 세계 최초로 감을 이용한 와인이고 맛 또한 뛰어나서 국내외 주요 행사에서 만찬주나 건배주로도 선정된 와인이다. 이 터널은 1904년에 완공되었고 길이가 1015m나 되며 국내 유일의 적별돌 터널이며 음이온까지 배출되고 있어 와인 숙성에 최적지라고 한다.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터널 입구에 들어서면 와인판매대와 시음장이 나오고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와인바를 지나면 관광지로 꾸며 놓은 포토존들이 나오고 마지막 끝에 다다르면 와인숙성고가 나온다. 곳곳에는 증기기관차가 지나며 뿜은 연기로 인해 그을음들도 볼 수 있고 붉은 벽돌에 이슬이 맺혀 떨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세계 최초 감와인 ‘감그린’ 한 잔 하고 바로 옆 군파크루지에서 루지도 시원하게 타고 소싸움경기장에서 진정한 투우를 보고 용암온천에 몸을 담그고 피로도 풀고 청도프로방스에서 야경사진도 찍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지 않을까? 근데 이 모든 것이 불과 5km 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청도를 찾으신다면 전국 3대 김밥 중 하나인 ‘청도할매김밥’을 맛보시길 권장드린다. 이상하게 뭐 들어있는 건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기는 매력이 있는 김밥이다.
경북 문경 오미자테마터널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문경시는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지로 둘러 쌓여 있는 곳으로 연간 천억 원 이상의 농가소득을 올리는 특산물이 있는데 바로 오미자이다. 오미자는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 해서 오미자(五味子)로 이름 붙여졌으며 차로 우려 마시거나 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재배하던 것이 문경에서 오미자청, 오미자와인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들면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오미자테마터널은 문경에서도 경치가 가장 아름답고 경북 8경 중 으뜸으로 치는 진남교반과 천혜의 요새 고모산성 아래에 위치해 있다. 오미자테마터널 역시 폐터널을 재탄생시켰는데 1950년대 산업화 초기 석탄을 생산하고 나르던 석현터널이 방치되었던 것을 문경의 특산물 오미자를 테마로 꾸몄다. 터널의 길이는 540m로 여러 휴게공간과 갤러리존, 이벤트홀 등 다양한 즐길거리들로 채웠다. 이 터널은 다른 터널들과는 다르게 터널 바깥도 아름답다. 터널 바로 위에는 천혜의 철옹성인데 임진왜란에 활용을 못해 아쉬운 고모산성, 영남에서 서울을 가는 길 중 가장 위험한 코스인 토끼비리가 있고 터널 바로 앞 또한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기찻길과 철교가 진남교반과 어울려 훌륭한 경치를 자아낸다. 오미자테마터널을 찾으신다면 꼭 고모산성, 토끼비리도 만나보시길 바란다. 산을 조금 타서 땀을 흘렸다면 그다음에 오미자테마터널로 들어가서 시원하게 구경하고 오미자와인 한 잔 하면 와인터널의 가치가 더 빛날 것이다.
에코월드, 철로자전거, 문경새재, 단산모노레일, 월악산 주흘산 대야산 조령산 등 많은 산들과 계곡 등 문경은 많은 볼거리, 즐길거리들이 넘치는 곳이니 며칠 묵으며 천천히 돌아보셔도 좋은 곳이다. 식사는 약돌돼지, 산채정식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지만 문경시내에 위치한 노포분식집 ‘남부떡볶이’에서 떡볶이, 고기튀김 등 각종튀김과 어묵을 드시며 학창 시절 분식집 분위기를 느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포장도 가능하니 숙소에서 야식으로 먹어도 좋다.
경남 사천 다래와인갤러리
사천 다래와인갤러리 역시 인근 진양호의 수위상승으로 인해 버려졌던 폐기차터널을 새롭게 조성하여 다래와인을 저장하는 문화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다래란 머루, 으름 등과 함께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과일이고 옛 문헌과 시에도 자주 나타나던 놈이다. 겉보기는 큰 대추처럼 생겼으나 맛은 달달하며 사과와 키위 비슷한 신맛이 나고 잘라보면 단면이 키위랑 똑같다. 처음 국내 키위가 도입되었을 때 양다래라 불렀다고 하고 국내산 키위는 상품명으로 참다래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의 우리 토종 다래는 구분하기 위해 산다래라고 부른다고 한다. 경남 남부 해안지역 그중에서도 사천은 국내 키위의 주산지이고 다래와인갤러리 역시 참다래(키위) 와인터널이다. 이 터널 역시 입구에는 다래와인을 시음하고 판매하는 곳이 있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와인저장고와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네 번 정도 방문한 것 같은데 갈 때마다 계속 갤러리 공간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다. 다래와인은 어떨까 처음에는 의구심이 생겼는데 맛을 보는 순간 이거 상품성 있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그만큼 맛있었다는 말이겠지.
여기 와인 작명법이 재미있는데 예전에는 삼천포와 사천이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사천과 삼천포가 통합되면 통합 사천시가 되었다. 와인이름도 3004(삼천+four), 4000(사천), 7004(삼천four+사천=칠천four)이다 ㅎㅎㅎ
다래와인터널은 행정구역은 사천이지만 가깝기는 진주와 더 가까우니 진주나 사천을 여행하신다면 꼭 같이 다녀오시길 추천드린다. 같은 행정구역인 사천시 곤양면에 ‘나산집밥상’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18,000원에 회와 장어백반정식을 모두 맛볼 수 있는 숨은 맛집이다.
경남 김해 와인동굴
김해 와인동굴 역시 폐선이 된 철도를 활용했다. 기술의 발달로 철로가 빨라지고 직선으로 펴지면서 예전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경전선 폐철로를 활용한 곳이 김해 낙동강레일파크이다. 낙동강레일파크는 크게 레일바이크와 와인터널로 나뉘어 있다. 순서는 당연히 레일바이크 타며 땀 흘리고 난 뒤 시원한 와인동굴에 들어가는 것이 맞겠지. 그리고 레일바이크와 와인동굴을 같이 미리 예매하면 비용은 조금이라도 줄어든다. 김해의 와인은 산딸기가 주재료이다. 부산의 위성도시로 여겨졌던 김해가 산딸기가 많이 재배되어 국내 산딸기 생산량 1위인 지역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산딸기와 복분자는 뭐가 다르지? 이런 의문이 생긴다. 둘 다 나무에서 열리는 베리류인 것은 같은데 생태를 떠나 우리가 접하는 열매에서만 차이점을 알아보면 산딸기의 열매알갱이들은 뾰족한 느낌이 들고 복분자 열매알갱이들은 동글동글하게 생겼다. 산딸기는 완전히 익어도 붉은색이지만 복분자는 검은색을 띤다. 그리고 맛에서도 산딸기는 단맛이 강하지만 복분자는 신맛이 강하고 질감이 강해 생과일보다는 복분자주 같은 술로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다. 김해와인동굴은 열차카페, 오크통 게이트, 와인전시장, 와인판매장, 베리의 산딸기마을, 와인정원 순으로 관람하게 되어있고 다른 와인동굴만큼 그렇게 길지는 않다.
와인동굴이 위치한 김해시 생림면은 밀양시 하남읍과 바로 강 건너 위치해 있는데 하남의 ‘소문난수산국수’는 제가 지금껏 맛본 멸치육수로 만든 국수 중 가장 깊고 깔끔한 맛을 내는 식당이다.
전북 무주 머루와인동굴
전북 무주는 전라도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짜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인 덕유산과 적상산이 있는 곳으로 그중 적상산은 사면이 붉은 절벽을 둘러싸여 산이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다 하여 적상(赤裳)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적상산의 중턱에 무주머루와인동굴이 자리하고 있다. 무주와인동굴을 다른 지역의 와인동굴과는 다르게 폐철로터널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무주양수발전소를 만들면서 터널을 뚫은 것을 2007년에 머루와인동굴로 새로 태어났다. 머루는 국산 야생포도로 포도보다 맛과 향이 진해 와인을 만들기 적합하고 일본 홋카이도에도 세계적인 머루와인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무주는 그 머루의 국내 최대 산지로 100곳이 넘는 농가가 머루를 생산하고 5개의 머루와인업체가 와인을 생산한다. 와인동굴은 입장료 2000원으로 무료시음이 가능하고 3000원을 추가하면 머루와인족욕도 가능하니 먼 길을 왔다면 체험해 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예전에는 무료시음으로 어른은 머루와인, 애들은 머루주스를 줬었는데 최근 글들을 보니 요즘도 그런 것 같다.
적상산에는 양수발전소가 있기에 당연히 적상호라는 저수지도 있고 그 길을 따라 차량으로 정상까지 올라가면 적상산전망대가 나오는데 그 경치는 당연히 엄청나지 않겠나? 그리고 적상호 근처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 중 하나인 적상산사고가 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으나 양수발전소가 축조되면서 물에 잠겨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한국 16개 보유로 세계 2위) 중 하나로 중요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적상산에서 와인과 경치, 우리의 역사를 즐기셨으면 무주읍내에 있는 ‘금강식당’의 어죽을 맛보기 바란다. 금강식당은 민물고기 어죽은 비릴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을 확실히 부숴버린 맛집이다.
충북 영동 와인터널
충북 영동은 전국 포도재배면적의 8%, 충북재배면적의 76%, 전국 포도생산량의 11%를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포도 주산지이다. 뿐만 아니라 복숭아, 사과, 배, 자두 등 많은 과일들이 전국 상위권으로 생산되고 품질이 좋은 곳으로 유명해서 국내 유일의 과일주제 테마공원인 ‘과일나라테마공원’이 있는 곳이다. 영동에만 와인와이너리가 43개소가 있다고 하니 포도와 와인의 성지가 아닐까? 영동와인터널은 타 지역 터널과는 다르게 개착식 터널공법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터널의 길이는 420m로 와인포토존, 영화 속 와인, 와인저장고, 와인체험관, 세계와인관, 와인문학관 등 12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와인의 문화, 체험, 시음까지 와인의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와인전문 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입장료가 5000원으로 다소 비싸다고 생각했으나 한 바퀴 둘러본 결과 아깝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지역상품권인 영동사랑상품권이 2000원 주어지므로 실제 입장료는 3000원이다.
인근에 같이 볼 만한 곳으로는 6.25 당시 미군의 사격으로 많은 양민들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근리 평화공원과 달도 머물다 간다는 아름다운 경치의 월류봉을 추천드린다. 식사나 간식으로는 국물이 있는 물쫄면이 유명한 영동읍내 ‘한양쫄면’에서 다양한 쫄면은 맛보시길 바란다. 국물이 있는 쫄면은 인근 옥천 풍미당도 유명하고 경주 명동쫄면과 경주 건천 감로당도 유명하다.
태풍이 지나가고 날씨가 시원해지나 했는데 또다시 더워진다. 이 여름 막바지 무더위 발악에 맞서지 마시고 시원한 와인터널에서 눈과 코, 입 모두 산뜻한 새로운 경험을 해보시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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